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와모토 테츠조 (문단 편집) === 전쟁 이후 === 종전 후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전범장교 색출에 두 번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이 때 공직 추방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탓에 일반 기업과 공장등에서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눈치를 보느라 그를 고용하지 않았다. 그 동안은 '진실은 이렇다'라는 [[반군국주의]] 라디오에 불려가 선전을 요구받았으며[* 이와모토는 군국주의자는 절대 아니었지만 파일럿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군인상이었기에 불명예스러운 딱지와 더불어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는 것은 치욕이었다.], 이후 낙향해서 일본 개척공사에 입사, 자신의 뉴스를 보고 연심을 품었던[* 학창시절 라바울에서 전공을 세우는 그의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짝사랑]] 했다고 한다.] 여인과 결혼했지만 3일만에 홋카이도 개척단으로 떠났다. 그러나 심장병으로 1년 반만에 돌아왔고 이와모토는 이때 부인의 얼굴을 잊었다고. 전후엔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에 찌들어 살아서 가족들을 곤란하게 했다. 그렇지만 정의감 강한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아서 이웃 결핵 환자의 시신을 전염이 무서워 아무도 건드리지 않자 콧구멍에 솜을 끼우고 들어가 혼자서 염을 하고 장사를 지내주었다. 손재주가 좋아 두 아이의 장난감을 손수 만들어줄 정도였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점령 통치 기간에 토목, 농사, 양계, 과자노점 등의 일을 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이후엔 간신히 방직공장에 입사하였지만 1년도 안돼서 [[충수염]]을 장염으로 오진받고 대수술을 받은 뒤 입원 중 허리 통증으로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늑골을 제거하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술을 받았으나, [[패혈증]]으로 두 명의 어린 자식[* 차남은 성인이 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항공자위대에 입대했다.]을 남겨둔 채 1955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병상에서 했던 마지막 말은 '건강해지면 다시 비행기에 타고싶다(元気になったらまた飛行機に乗りた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